산행기

천왕봉에 모처럼 오르니까 아스련히 생각 나는것

변유섭 2012. 6. 22. 16:21

 
2012년 6월 16일 08 50분 天王峯(같은 글자라지만 나는 '峰' 보다는 '峯' 이 좋다)

 

큰 카메라 들고 앉아계신 분이 요즈음 내가 큰산에 가면 자진해서 내 수호천사 노릇을 해 주시는 분이다.

 

모처럼 천왕봉에 올랐더니  옛적 산행 친구들이 무척 그리워 지므로 집에 돌아와서

정리도 안하고 수십년간 쌓아 놓았던 사진 보따리들을 뒤져보니까 다행히 아직도 제법 많은 사진이 남아 있었다.

 

1971년 8월 29일 오후 5시경의 천왕봉

 

1971년 봄부터 지리산을 종주하려고 몇달간 연구(?)하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한 신군(영민)과 나는 1971년 8월 28일 밤기차 타고 서울을 떠났다.

새벽에 남원역에 도착하여 버스 세번 갈아타며 마천면 파출소에 입산 신고한 뒤, 마을에서 朴又甲이라는 심마니 한 분을 짐꾼 겸 안내인으로 고용(일당 천원)하여 짐을

나누기는 했지만 그래도 각자  20킬로그램이 넘는 짐을 지고 힘겹게 지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겠지만 1971년의 등산야영장비로 사용된 장비는  2차대전때 미군이 설계한 무거운 군용장비가 거의 전부였으며 장기산행중 반찬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1파운드짜리 통조림이 대부분 이었다.

 

75년에 등산중 추락사고로 돌아가신 것으로 발표된 장준하선생과 그를 따르는 5-6명의 젊은이 일행을 제석봉 기슭에서 숨넘어가기 직전에 만났다. 그분 일행도 지리산을 종주하려고 오늘 아침 중산리에서 떠났다는데 우리보다 합리적으로 가볍게 짐을 꾸린것 같았다. 그들이 3박 4일동안 우리가 만난 유일한 등산객들 이었다.

 

8월 29일은 장터목에서 야영했는데 너무 지쳐서 신군도 나도 술 한잔도 못 마시고 그대로 잠 들었나 보다. 아침에 보니까 스카치 위스키 병 뚜껑은 열려 있었는데 술은 한잔도 줄지 않았다.

 

1971년 8월 30일의 벽소령 풍경 : 지리산 남북 관통 도로를 건설하다가 왠 일인지 중단했기 때문에 벽소령 좌우 계곡과 능선 일대는  바위와 맨땅이 깊고 길게 파인체로 노출된 도로 건설 흔적으로 흉물이었다.

우리의 가이드 박우갑씨는 심마니 였으므로 지리산 능선중 자기가 다니던 벽소령까지만 길을 알았기 때문에 벽소령부터는 많이 헤맸다. 당시는 지리산에 등산로가 거의 없었으며, 등산용 지도도 없었다. 그러나 산행에는 지도가 필수품이라는 생각으로 내가 특별히 입수하기는 했지만 등산로가 표시되지 않은 5만분의1 지적도 이었으므로 길

없는 산에서 헤맨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오후 늦게 도착한 노고단에서 박우갑씨, 얇은 양말에 검정 고무신만 신으신 박선생은 우리들보고 등산화가 무거워서 못 걷는다고 하셨다. 


71.8월 31일 밤 늦게 화엄사 여관촌에 도착하여 술마시고, 누군가가 사고치고, 잠자고나서

9월1일 화엄사 각황전 앞의 신군 

 

대웅전 앞의 나

 

지리산화엄사 현판앞에서 신군과 나.

 

주로 서울 근교산만 뒤지고 다니던 우리는, 지리산종주에서 얻은 값진 경험을 발전시켜 원거리 산행도 즐기게 되었다.


같은해  10월 8일-10일 신군(영민), 최군(태홍)과 나 : 한글날 연휴를 이용하여 

작은짐 지고 즐겁게 설악산 대청봉을 다녀왔다.

 

71년 10월 9일 대청봉의 신군, 당시에는 표지석이 없었다.

 

중청봉에서, 최태홍

 

희운각의 화장실 부근에서 나, 내게도 젊은시절이 있었구나...

 

희운각 부터 시작되는 표고차450m의 깔때기를 생전 처음으로 기어 올라 소청에 막 올라선 지점에서의 환희...  지금은 저 나무도 없고 부근의 흙도 크게 쓸려내렸으므로 공원 관리공단에서 더 큰 훼손을 방지하려고 그곳에 전망대도 만들고 나무계단도 만들어 놓았다.


72년 6월4일- 6일 : 현충일 연휴기간을 이용하여 신군(영민),최군(태홍),이명수(미국으로 간 의사)와 나는 설악산의 마들령을 넘었다.

우리가 떠나던 날 홍군(성훈)은 간도 크게 충무로에서 홍정형외과를 개업 했으므로 같이 가지 못했다.

 

이때쯤 국산 등산장비가 시중에 나오기 시작하였으므로 기본적으로 군용 A-Tent와
유사하게 만들어진 텐트를 신군이 구입하였으나 군용보다 개선된 점이 거의 없었다. 

 

설악동 무명용사비 앞에서 

 

신흥사에서, 현충일이라 조기가 이채롭다.

 

 

신군, 최군과 내 등에 걸려있는 짐의 크키를 보라. 당시에는 시장에 지금과 같이 다양한 배낭이 없었다. 따라서 이런 저런 배낭을 관찰하던 중에 저런 형태의 일본제 배낭을 사용하는 직장선배로 부터 그런 배낭을 '키슬링' 이라고 한다는 얘기는 들은 뒤, 우선  특수천을 지붕 덮개로 사용하는 공장을 찾아가 무척 질긴 원단을 구입하였다. 재료는 구했으므로 이번에는 손으로 배낭을 만들 수 있는 기술과 공구를 갖춘 사람을 남대문 시장에서 물색하여 원단을 주고 정말로 튼튼한 수제 키슬링을 세개 제작하였다. 

 

현충일 연휴에도 설악산이 얼마나 한적했는지 모른다. 신흥사에서 울산바위 가는 길옆에서 등멱을 할 수 있었다. 

 

처음이니까 울산암도 올라갔다.

 

 

1973년10월6일- 9일 : 한글날 연휴를 이용하여 홍군(성훈)이 처음으로 장기산행에 참가했다.


73년 10월 7일 바위가 미끄러워서 홍군인지 신군인지 한명이 수렴동 계곡에서

'퐁당'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수렴동 계곡에서, 홍군과 나

 

 

쌍폭 부근일 것이다. 저 아름다운 여인들은 56회동기 조명륜의 여동생과 친구인데
어떻게 같이가게 되었는지 기억에 없지만, 이 미녀들 때문에 당시 미혼이었던 나는
가슴이 두근 두근 했었다. 그 예쁘던 공주님들도 이제는 손주.손녀보며 즐기시겠지...

내 가슴에 달고다니던 지도는 국립지리원 발행 2만5천분의1 지도 4장을 붙힌후
등고선을 따라 색연필로 채색해서 설악산 지형을 한눈에 알아볼수 있게 내가 공들여
만든 것으로 매우 유용하게 활용하였다.

 

 

그때 산행코스는 백담사 -> 수렴동계곡 -> 봉정암 -> 소청 -> 희운각 -> 양폭
-> 신흥사 -> 설악동 이었는데

 

이곳은 희운각 부근일것이다.

 

 

73년 10월 8일 설악동 여관에서 잤는데 다음날 아침 조명륜 동생과 그 친구가 참기름과 식초를 밥에 뿌려서 싸준 김밥이 무척 맛있던 기억이 있다.

 

73년 10월 9일, 지금은 공원이 된 설악동 여관촌을 배경으로 

 

74년 6월 5일 - 6월 9일 : 현충일 연휴를 이용하여 홍군과 나는 지리산-남해바다여행하였다.

7월 6일 중산리에서 법계사로 오르다가 너무 지쳤으므로 오후 5시경 후퇴를 결정한

직후의 사진

 

 

한참 후퇴하여 칼바위 옆에서 노숙(뷔박)하고 6월7일 장터목을 경유하여 천왕봉에 올랐다. 

 

내가 서 있는 바위가 천왕봉 표지석 보다 50쎈치미터 이상 더 높으므로 이 바위가 1915.4m 지점일 것이다,

 

 

정말 으시시 했던 제석봉의 고사목 무리,

 

 

2012년의 제석봉 고사목을 찍으려고 여러 각도에서 셔터를 눌렀으나 그 많던 고사목은 거의 없어지고 다양한 고산식물군으로 복원되었다. 자연의 생태 복원력은 무섭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제석봉의 구상나무 생태 복원을 위하여 90년대부터 제석봉을 출입금지 구간으로 정하고 많은 구상나무 묘목를 심어오고 있는것이 눈에 보이지만

죽은 묘목이 많은것을 보면 성과는 빠르지 않은것 같다. 

 

 

 

6월7일저녁 세석평전(잔돌)에서 다시 노숙하고 6월8일 아침 7시 30분.

 

 

그후 코스는 세석평전떠나 -> 대성동 -> 신흥리-> 쌍계사 -> 하동-> 신노량(남해대교) ->부산 ->서울 이었다.

 

삼신산 쌍계사에서

 

 

어느기관에서 소위 행정지도(?)를 했는지 모르지만, 식당마다 'eating house'라고 써붙힌 신노량의 여관에서 자고


당시는 여수-부산간에 제일 빠른 교통수단인 이태리제 고속선'엔젤호"를 기다리며

 

 

75년 1월 2일 - 5일 : 신년 연휴를 이용한 마등령과 동해여행 : 신군, 홍군과 나는 눈덮힌 마등령을 넘어 동해에 가서 한잔하는 신년맞이 산행을 3년간 계속 했는데 그 후 중단한 이유는 모르겠다.

75년 1월 3일 오세암에서 

 

같은날 오세암 뒤 첫 깔때기를 올라서서 

 

마등령에서

 

75년 1월 4일 경포대 낙원집에서 : 사진 뒤에 '멍게맛이 각별했음'이라고 써 있다.

 

낙원집은 뚱뚱이 아줌마가 친절하므로 영민이가 특히 좋아해서 3년간 이집만 다녔다.

 

휴전후에 복원한 철도로서 청량리에서 경포대까지 직접 갈 수 있는 철도가  그때까지만 해도  경포대 해변에 있었으나 75년 5월인가, 새말-강릉간 영동고속도로의 최종구간 개통후, 공로 교통세력의 로비로 인하여 힘없는 철도는 철거 되었을 것이다. 

 

75년 5월 : 홍군(성훈), 최군(태홍)과 내가 같이 갔으나 알쏭달쏭한 산행.


홍군, 최군과 내가 찍힌 사진 인화지에 '현대칼라 75년 5월'라고 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간 시기는 알겠는데 사진속의 여자 두명은 전혀 기억에 없지만 홍군 병원의
간호사 일지도 모르겠고... 사진속의 '각황전' 현판의 글자체를 자세히 보면 화엄사 각황전 같기는 하다만. 최군아 생각나면 알려 주면 좋겠다. 

 

 

 

 

별로 재미 없는 얘기 너줄하게 쓴것 너그럽게  읽어 주신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