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 데 산띠아고

2,000리 걷고 와서(6)

변유섭 2007. 12. 30. 13:47

 

2007년 8월 27일(34키로 걸은날)

 

5시 50분 전지들고 혼자 출발하여 30분쯤 가자 마틴이 나를 추월한다.

 

오늘은 발바닥이 뜨거운것 외에 양쪽 새끼 발가락 까지 따가워 걷기가 괴로운데 까미노가 수시로 111번도로와 만남으로  아스팔트 걷는 기회가 많아 속도가 느리다.

 

길 안내의 주종은 건물벽에, 전신주에, 나무기둥에, 길바닥에, 온갖 곳에 그려진  이런 노랑 화살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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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나(Viana)지나고 로그로뇨(Logrono) 대성당의 첨탑이 멀리 보이는 곳에서 나바라 지방이 끝나고 리오하 지방 (Provincia de La Rioja )으로 들어섰다.  행정구역이 바뀌니까 까미노 를 표시하는 조형물도 바뀐다.


로그로뇨 입구에 할머니 한분이 순례자들에게 스페인식의 딱딱한 토스트와 커피를 자율지불 방식 으로 제공하며 쎌료도 찍어 주는데 자전거 순례자들이 많이 이용 하는것으로 보인다. 나도 마시고 싶던 커피를 두잔 마시고 2유로 놓고 나왔다.

 

11시경 도착한 로그로뇨는 리오하 지방에서 제일 큰 도시로서 와인 산업의 중심지라는 명성 답게 신시가지는 꽤 번화하다.

 

로그로뇨의 이름없는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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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약방에 들어가 양말을 벗고 윗쪽 피부가 벗겨져 피가 나는 새끼 발가락을 약사에게 보여주니
등록상표 Compeed 라는 표지가 있고, Ampollas Bolhas라는 이름이 써있고,

 

투명한 접착 플라스틱에  노란색의 유연한 물체가 붙어있는 것을 주며 상처 부위에 붙이라는 시늉을한다. 그것을 양쪽 새끼 발가락에 붙이고 걸으니까 신기하게도 따가운 느낌이 전혀 없다.

 

그러나 여전히 뜨거운 발바닥을 이끌고 교외에 있는 호수 주변의 골프장에 있는 바르에 도착하여

 

야외 테이불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며 마시는 콜라 맛이 너무 시원해서, 문득, 컴피드 같이 신기한 약도 없고 냉장고도 없던 중세에 순례자들은 어떻게 이런 고통과 갈증을 극복 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때나 이제나 똑같은 인간인데, 오늘날의 물질 문명에 찌든 내  몸과 마음이 상대적으로 더 큰 고통을 느끼는것 같아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가자... 가자...

 

자동차길과 평행하는 제법 높은 언덕에 올라 로그로뇨를 뒤돌아 보고, 언덕위에 세운 커다란 투우 소 조형물을 바라보며  단체로 온듯한 독일인들과 함께 내리막 길을 기다싶히 내려가,

 

9시간이 지나 서 오후 3시경 나바레떼(Navarrete)의 공립 알베르게에 짐 풀었다(3유로).

 

이곳은 큰 방마다 샤워시설이 있고, 층마다 변소가 있으며 주방과 식당도 깨끗했고, 오스피딸레로도 친절했다.


사진은 외부 수리중인 알베르게와  저녁먹은 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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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도 걷기에 바빠 사진을 하루에 몇장 밖에 찍지 못했으나 오늘은 특히 사진을 찍지 못했다.

 

계속 걸으면 발바닥이 마비되어 뜨거운 것을 거의 느끼지 못 하지만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거나 잠깐 쉬었다 걸으면 통증이 새롭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세탁후 성당앞의 관광안내소에 들렸으나 씨에스타 시간이라 문이 닫혔다.이 나라도 관광수입 의존도가 높다는데 이래도 되는걸까?

 

영어메뉴 있는집 드물고, 가끔 불어나 독어는 보이던데 영어 안내문은 거의 없고 이래도 되는지 정말 의문이다.

 

저녁은 옆집 까페 밖에서, 마틴과 트리시아가 합석한 옆 테이블에 앉아, 힐마와 함께 순례자 메뉴를 먹었는데 저녁 8시 까지 기다리게 한 후에야 주문을 받기 시작했지만

 

음식은 맛이 있어 음식과 함께 제공되는 와인 1병 외에 별도로 와인 1병을 더 시켜 먹었다.(9+9+5+�2=25유로 : 내가 냄)

 

오늘도 2층벙커가 배정 되었지만 힐마가 도와주어서 메트리스를 바닥에 내려놓고 잤다.

 

 

<<가이드북에서 발췌한 까미노의 배경>>

 

((카톨릭 이전에 이곳에 살던 고대 켈트족과 그후 이곳을 점령한 로마인들은 , 당시로서는 육로로는 더 갈 수 없는 서쪽 끝의 "땅끝"(라틴어로 Finis Terrae  :  The end of the world :현재의 Finisterre : 갈리씨아어로 : Fisterra)에 있는

 

태양신전(Ara Solis)을 참배 하기 위하여 은하수를 따라 서쪽으로 가는 길을 만들었고,

 

9세기에 이르러  이지방 사람들이 이교에 물 드는 것을 방지 하고자, 침범하는 무어족을 몰아내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카톨릭 당국이  산띠아고 순례라는 방법을 시행 하였고,

 

이지역 교회도 순례에 의한 경제적 이익이 있으므로, 순례의 목적지로 산띠아고 데 꼼포스텔라를 장려했고,  터키가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함에 따라 예루살렘 성지순례가 위험해 졌고,

 

불란서 카톨릭이 이곳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으므로, 9세기 이후 2-3백년간 순례자가 크게 증가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불.서 국경에 가까운 프랑스 내의 여러개의 지점(제일 많이 출발 하는 곳이 쌍 쟝 삐에드뽀) 부터 산띠아고  꼼뽀스뗄라 까지의 순례길을 프랑스 까미노(the camino frances)라고 부른다.

 

특히 1189년 교황 아렉산더3세가 성년(Holy Year : 산띠아고 성인의 축일인 7월 25일이 일요일 인 해)에 순례하는 사람은 사후 연옥(Purgatory)기간을 전부 면제해 주고 평년에 순례한 사람은 연옥기간의 반을 면제 해 준다는 칙령을 내림으로서 더욱 성행하여,

 

11세기와 12세기에는 1년에 50만명이 순례 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순례길을 따라 교회가 생기고 마을과 도시가 번창 하였으므로 무어족의 북진을 막을 수 있었다 .

 

그후 이 지역에서 기독교가 회교 세력을 모두 물리쳤고, 16세기 유럽 이 재편되고 불안정 해 짐에 따라 순례자 수는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여 20세기 중반에는 일년에 몇 명 만 순례할 정도로 감소 하였다.

 

그러나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산띠아고는 여전히 이 나라의 수호성인 이고, 현지인들은 까미노의 경로를 추적 할 수 있으므로,


1960년대에 스페인의 선각자 한분이 각고의 노력으로 최초의 현대판 가이드북을 완성 함으로서 1980년 까지 순례자가 서서히 증가했다.

 

1982년에는 교황으로는 최초로 요한바오로2세가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를 방문 하였고,

 

1987년에는 European Union(어떤  책에는 The Council of Europe)이 유럽 문화재(European Cultural Itinerary/혹은 Route)로 선포 하였고,

 

1993년 에는 유네스코가 세계유산 목록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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